학생이였던 08년도 때 대만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평생 외국에 가본 적이라고는 없는 내게는 좋은 경험이자 추억이 되는 일이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외국 학회는 중국, 대만만 가게 되어서 안타까웠다. 호주나 유럽, 미국에서 학회가 열리면 안되는가
대만에 있던 기간은 3~4일에 불과하지만,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을 적어보려 한다.
대만은 중국하고 비슷한 느낌이다.
역사적으로 원래 그러할 수 밖에 없지만 중국에 갔을 때와 거의 흡사한 느낌이였다. 조금 더 세려된 중국의 느낌이랄까.
잠깐 중국, 홍콩, 대만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역사 이야기를 하겠다.
홍콩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난징조약을 통해서 1897년부터 1997년까지 100년동안 쓰기로 한 땅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대단한 계약이다. 100년간 땅을 빌려쓰고 돌려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에 홍콩 땅을 영국이 중국에게 돌려주긴 하였지만 100년이란 기간이 긴 시간이지 않은가.
홍콩 국민들은 중국인이지만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 체제와 많은 경제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1997년 홍콩땅을 중국이 돌려받았지만 사회주의인 중국과 홍콩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래서 중국이 선택한 것이 한 나라에 두 개의 체제를 유지하는 "일국양제"였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유지하지만 홍콩의 민주주의를 존중하면서 간섭을 최소화하여 원만한 관계르 유지하고 있다. 명칭도 "홍콩"에서 "홍콩 차이나"란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만은 어떠한 관계일까?
19세기 말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이어졌다. 간단하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였는데 이 싸움에서 이긴 것은 공산당이였다. 싸움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군인 100만명을 이끌고 바다 건너 땅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것이 대만이였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대만에는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인 고궁박물관이 있다. 60만점 이상의 중국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는데 대부분 자금성에 있던 것들이라고 한다.)
국민당을 이끌던 장개석은 대만으로 간 후에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내고,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싸움에서 패한 국민당이 섬으로 도망가서 새 국가를 내세운다고 하니 중국에서 볼 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일 것이다. 현재는 모르겠지만, 중국과 대만은 늘 민감한 관계를 유지했고 중국과 수교를 맺을 때는 대만하고는 수교를 단절하게 되는 사례도 꾀 있었다.
그럼 짧은 대만 여행 이야기를 해볼까?
대만의 돈은 뉴 타이완 달러라고 한다.
보이는 대로 100, 500, 1000단위이다. 중국에서 쓰이는 화폐 단위인 "위엔"하고는 다르다.
내가 간 곳은 "101 빌딩", "화시지에 야시장", "고궁 박물관"이다.
아래는 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이동한 사진들이다.
도착한 대만.
역시 말과 글씨만 틀리고 크게 다를껀 없다.
그런데 리무진 버스만을 이용해서는 예약해놓은 숙소로 갈 수가 없었다.
지하철을 이용해서 숙소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지하철도 우리와 크게 다르진 않다. 다만, 한글, 아니 영어였으면 좋겠다. 저 한문들을 보자니 어릴 때 왜 한문 공부를 게을리 하였나 싶었다.
지하철에서 쓰이는 토큰은 대전 지하철에서 쓰던 것과 유사한 것 같았다.
또 하나 느낀 것은 대만은 차보다 오토바이가 더 많다.
그냥 많은게 아니고 엄청나게 많았다. 시내쪽은 한국과 많이 흡사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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